자유의 감옥/미하엘 엔데 지음/이병서 옮김/보물창고/2005
작가 소개
미하엘 엔데 Micheal Ende
판타지 소설 [모모]와 [끝없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 미하엘 엔데는 1929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풍요로운 예술적 영향을 받으며 자란 그는 영혼이 피폐한 세상 사람들에게 환상과 꿈의 세계를 되찾아 준 작가이다. 엔데는 판타지 소설 외에도 아름다운 동화와 그림책, 희곡, 시 등 매우 다양한 작품을 썼으며, 독일 청소년 문학상,유럽 아동 문학상, 안데르센 문학상 등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문학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또한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2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199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계의 언론들은 그를 단지 작가로서가 아니라
'판타지라는 수단을 통해 기술과 돈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고발한 철학가'로 재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엔데의 저서로는 [모모], [끝없는 이야기], [마법의 설탕 두 조각], [렝켄의 비밀], [마법의 수프], [거울 속의 거울]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미하엘 엔데님. 동화속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느낌이 납니다 ;ㅁ;)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은 8개의 단편집입니다.
미하엘 엔데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이
(그래봤자 저는 모모밖에 안 읽어봤지만) 판타지입니다.
판타지라는 것은
fantasy.
환상.
상상,
공상소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보면, "
현실생활의 논리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꾸민 소설"이라고 하여 "
어린이의 공상력과 상상력을 키워주고 감성을 윤택하게 만든다고 한다"고 되어있지요.
그래서 판타지는 어린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유치한 것-이 되어버렸나봅니다. 절대 어린자만의 전유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요.
서론이 길어지고 있군요.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합니다. 인간이란, 나이에 상관없이 "
상상하는 동물"이라는 것.
끊임없이 뇌속에서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라는 것이 항시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던가요? 잠시만 틈을 주면 공상과 상상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동물 아니던가요. 아주 간단한 예로 틈만나면 "로또에 당첨된다면"이라는 공상속에서 행복해지잖아요?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이 또 나왔습니다. "
행복"
우리는 그 상상(
공상, 상상, 망상 모두 상상으로 통일하겠습니다. 그 의미의 차이가 있던지 말던지요!)속에서 행복합니다. 나는 그 상상속에서 무조건 주인공이고, 나는 그 상상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공이고 싶지 않다면 당장 조연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이 바라는 것-. 즉, 내가 바라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긴 여행의 목표.
78쪽
우리가 말하고, 읽고, 행동하는 것은 이미 그 다음 순간에는 더이상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현실이라 말하는 현재라는 것도, 그것을 머릿속에 떠올리기가 무섭게 지나가 버리고 마는 미분의 찰나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87쪽
"이런 식으로 인간은 모든 걸 찾아냈소. 고대 유인원과 공룡의 뼈까지도.... 왜? 그걸 찾으려 했으니까! 인간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만든거요, 하나하나..그러고는 말하지. 신이 그것을 만들었다고.... (중략) '그렇게 정의롭고 성스러우신 신께서 왜 이처럼 모자라고 불완전한 것들을 만드셨나요?' 이 무슨 귀신 콩 까먹는 소리야? 인간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었는데, 인간은 그 사실을 몰라. 하긴 알려고 들지도 않지. 왜냐하면 그런 자신이 두렵거든!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네가 그것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그것을 찾을 수 있었다.'라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 자기는 원래 다른 걸 찾을 생각이었다나 어쨌다나...."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바침. 102쪽
현실은 무엇이 '단순히 있다'는 사실 외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의식'이 전제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는 이말의 의미를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현실의 성질'은 '의식의 성질'에 의해 좌우된다고 대담하게 추론헤 볼 수 있다. 특히 후자, '의식의 성질'은 모든 민족, 모든 인간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으므로, 이 지구상의 수없이 많은 장소엔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현실이 존재할 뿐 아니라, 한 장소에도 여러 현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이 얼만든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상상속에서만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속에서도 인간은 "
원하는 것"들을 보고 듣습니다.
상상속에서처럼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
물론 현실에는 언제나 제약에 부딪히지만요)
하지만, 이 현실이라는 것은요. 인간이 있든 말든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닌겁니다. 현실 역시 인간이 인식할 때 바로 "현실"이 된다는 것으로 최근 읽은 교고쿠 나츠히코씨의 작품에서도 이런 인식론이 등장하지요. 이런 사상은 꽤나 유행중인건가요? ㅎㅎㅎ
암튼, 인간이란 건 꽤나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성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똑같은 돌덩이를 봐도 느끼고 생각하는 건 사람마다 다르죠. 그리고 그 돌덩이와 연결되는 바탕지식도 다릅니다. 결국 현실이라는 건 개개인마다 다르게 구성해나가는 것인지라, 정답은 없고, 지식의 가치도 언제나 다르며, 누구나 도달해야할 목표가 동일하지도 않지요.
그렇다면, 이렇게나 중요한
나 자신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을까요?
시릴처럼 그 기준을 찾기 위해, 살아가는 목표를 찾기 위해 "탐색여행"이라도 해야할까요?
미스라임의 동굴 속에서는 깨어있는 영혼이었던 그림자 "이브리"처럼 세상의 정의를 찾기라도 해야할까요?
길잡이의 전설에 나오는 콩테 아타나시오 다르카나처럼 자칭 길잡이로 살아가보는 것도 괜찮을지도요.
자유의 감옥 속 인샬라 처럼 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삶은 어떨까요?
아니면 여행가 막스 무토처럼 좋아하는 여행을 끝없이 계속 하면서 살아볼까요.
뭐.
사실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유롭다는 것은 어떠한 가능성을 가진 여러가지의 대안들 중에서 하나를 어떤 압력도 받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 위해 살아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살아갈 수도 있고, "세상의 정의"를 되찾기 위해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죠. 인간은 애초에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선택하는 순간 자유는 없어지지 않나요? "이렇게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마치 관성처럼요. 어느 순간 꼭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밀고 나가는군요.
어린아이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어른들은 어느샌가 벽창호가 되어버린 이유는,
어른들은 자신이 선택한 길 속에서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감옥-이 아닐까요.
자유로운 선택 뒤에 오는 감옥 말입니다.
물론 이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도 몹시 힘든 일인데다가, (사실 선택하는 행위에 대한 억압도 어떠한 의미로 감옥-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미스라임의 동굴. 180쪽
자신을 안내해 주던 목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는 자신의 과제와 목표를 스스로 만들어 내야만 했다.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정신과 호흡을 가다듬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외로움이였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갈지 결정한 문을 열고 나서 더욱 부자유스러워지는 것이군요.
그래서
자유의 감옥-1011번째 밤의 이야기
280쪽
높고 위대하신 알라시여. 저를 모든 자기기만으로부터 성스럽게 하시고, 거짓 자유에서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선택할수도 선택할 것도 없기 때문에 저의 보잘것없는 모든 자유 의지를 영원히 던져버리고 당신의 성스러운 의지에 저의 모든 것을 불만없이, 그리고 이유 없이 맡깁니다. 저를 이 감옥으로 인도하고 이 장벽 속에 영원히 갇히도록 한 것이 당신의 손이었다면 저는 이 상황에 만족합니다. (중략) 저는 이제 자유 의지의 망상을 영원히 벗어 던지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제 꼬리를 먹어 치우는 뱀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부자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성스러움과 모든 지혜는 오직 전지 전능하고 유일하신 알라에게만 있습니다.
이렇게 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리기도 하는 것일지도요.
자유의 감옥.
감옥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감옥이라는 것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게 만든 억압된 곳"아니었던가요.
그렇다면 자유의 감옥은 어디일까.
자유가 주어짐으로 인해 억압받을 수 밖에 없는 곳-이 자유의 감옥이 아닐까.
7번째 단편집에서처럼 "선택의 기회가 무긍무진하여 함부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바로 자유의 감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 자체도 자유의 감옥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8개의 단편집에서 인물이 그러하듯, 자신이 선택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감옥"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어른들은 판타지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일테지요.
자신의 상상에서 자유롭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은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존재들. 바로 자유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곧 그들도 자유의 감옥속에서 살게 되겠지요.
그러나 자유의 감옥속이라 해도 - 그 공간 자체는 행복과는 별개-입니다.
자유롭지 않지만,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자유로와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니까요.
어떻게 살지는 - 바로 우리들. 개개인의 선택-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인 것입니다.
정리된 독서감상문(보기-클릭)
감옥안의 자유-독자의 편지
친애하는 M.E.씨
최근 저는 감옥 속에서 자유를 찾은 여덟명의 사람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여덟명의 최후는 모두 안개속에 그려져 있었지만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준에서 그들은 모두 파랑새를 찾아냈다는 것을요. 저는 이 책에 용기를 얻어 제가 생각했던 것을 표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구는 분지지형으로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서 둘러보아도 대지가 떠받히고 있고,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쌓여져있습니다만, 하늘만은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습니다. 게다가 아무데도 나갈 수 없도록 대구시민들을 꽁꽁 묶어놓고 있을 것 같은 산도 그 계곡길로 강줄기를 뽑아냅니다. 세상은 마치 아무리 꼭꼭 묶어도 새어나가는 풍선 속의 공기처럼 어디로든 열려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넓은 태평양 위의 하와이에서도 우리는 폐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즉, 세상은 어딜가든 감옥입니다. 세계일주를 한 영국신사도 우주로는 나갈 수 없었고, 달에 도착한 암스트롱도 태양계밖으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무궁무진할 것 같은 상상력도 생각해보십시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한 것 이상의 상상력을 발진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감옥 속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감옥이라는 것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틀”입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모순된 말을 해야겠습니다. 감옥은 부자유스러운 공간입니다만, 사실 저희들은 모두 자유롭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종교를 가질 수 있고 노력만 하면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서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책을 읽고 내가 원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자유란 “어떠한 가능성을 가진 대안들 중에서 하나를 어떠한 압력을 받지 않고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왜 자유를 가진 존재들이 감옥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셨나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두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자유롭게 선택한 뒤에는 감옥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자유의 감옥]에 나오는 ‘인샬라’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마에게서 진리를 얻은 인샬라는 수많은 문에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문이든 선택할 수 있었지만, 문을 열고 난 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즉 책임감에 아무 문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부자유라는 진리를 얻었습니다. ‘인샬라’가 겪은 두려움은 항상 저도 느낍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자유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감옥에 둘러쌓여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선택하고 하지 않는 것도 자유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다른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선택한 뒤의 감옥입니다. 이 감옥이 바로 제가 말씀드린 “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선택해서 교육대학에 왔습니다. 그러나 4년이 지나고 어느샌가 저는 교육대학교생이 되어있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라, 제가 원하는 만큼 보이고 들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세상을 교육대학교생이 되어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긴여행의 목표]에서 ‘시릴’이 살아가는 목표를 찾기 위해 시작한 여행은 어느새 여행 자체가 살아가는 목표가 되어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여행가 막스 무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스라임의 동굴] 속에서 깨어있는 영혼이었던 그림자 ‘이브리’가 어느새 영웅이 되어있었던 것은 어떠십니까? ‘이브리’는 다른 그림자와 다르게 자유로웠지만, 그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자유라는 감옥은 또다시 나타납니다. 내가 자유롭기 때문에 반드시 감옥속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과 자유로 인해 부자유스러워진 삶의 공간. 이 두가지가 행복의 변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삶의 목적이라는 것은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는 것인데, 감옥속에 있다고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자유롭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덟명이 모두 파랑새를 찾았다고 느껴졌다는 것은 물론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왠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감옥이라는 공간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작은 차안에는 대가족이 살아갈 수 있었고, 보로메오 통로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부부는 떠났습니다. 히어로니무스 호른라이퍼, 마토, 콩테 아타나시오 다르카나, 인디카비아는 이름을 바꿀때마다 새로운 감옥을 만들었고, 그는 결국 빛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감옥속에 있고, 가끔씩 정말 답답하다고 목을 매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자유롭고, 곧 새로운 감옥을 만들겠지요.
그것은 저의 감옥이고, 제 자유로운 선택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며, 저는 그 감옥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넓은 감옥에서 살아보려 합니다. ‘이브라’는 강한 햇빛을 받아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림자라는 것은 빛을 가리는 물체가 없으면 생기지 않는 법. 즉, ‘이브라’는 새로운 감옥에서 새로운 실체를 찾았을 것이므로, 저도 새로운 저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교육대학교생 현정은 올림
추신 : 아마도 자유는 감옥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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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3 10:49
고마운 녀석.ㅎㅎ
2006/12/23 11:03